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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사라진 뒤에야 보이는 것들

by 라이언빌 2026. 8. 4.

 

이번 글에서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포스터의 언발란스하고 초점이 덜잡힌 저 난닝구차림의 남자.
영화 포스터같지 않은 이 허접함.

과연 의도일까 아닐까요 아래에서 확인해보세요!

 

 

찬실이는 복도 많지(2020.03.)
찬실이는 복도 많지(2020.03.)

 

 

 

<목차>

1. 등장인물 소개
2. 명장면, 명대사 소개
3.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음악
4. 감상평

 

 

1. 등장인물 소개

 

- 배우 강말금(이찬실 역)

 강말금은 영화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온 마흔 살 프로듀서 이찬실 역을 맡았습니다. 찬실은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감독이 술자리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습니다. 모아둔 돈도, 집도, 결혼도, 이룬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그제야 마주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주저앉지 않고 산동네 꼭대기 하숙집으로 이사를 하고, 친한 배우 소피의 집에 가사도우미로 취직하며 어떻게든 살길을 찾아가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강말금 배우는 부산 출신으로 부산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극단에서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연극 무대에 섰던 경력이 있습니다. 이 작품이 그녀의 첫 장편 영화 주연작입니다. 오랜 무명 시절을 지나 마흔이 넘어 스크린의 중심에 선 배우가 마흔 살 실직자를 연기했다는 점에서, 찬실이라는 인물을 연기한 강말금은 말그대로 인생캐릭터를 만났던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녀는 이 영화로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을 비롯해 여러 시상식에서 신인상을 받으며 단숨에 주목받는 배우가 되었습니다.

 

- 배우 윤여정(할머니 역)

 윤여정은 찬실이 세 들어 사는 산동네 집의 주인 할머니 역을 맡았습니다. 할머니는 무뚝뚝하고 어딘가 수상쩍어 보이지만, 실은 정이 넘치는 분입니다. 그녀는 행정복지센터에서 뒤늦게 한글을 배우고 있으며, 먼저 떠나보낸 딸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갑니다. 찬실에게 밥을 챙겨주고 딸의 방을 내어주면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두 사람은 서서히 가족이 되어갑니다.

 

 윤여정은 김초희 감독의 단편 영화에도 출연했을 만큼 감독을 아끼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저예산 독립영화인 이 작품에 흔쾌히 참여했습니다. 이 영화가 개봉한 이듬해 그녀가 세계적인 배우로 우뚝 섰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 작품 속 그녀의 소박한 연기는 더욱 귀하게 느껴집니다.

 

- 배우 김영민(장국영 역)

김영민은 어느 날부터 찬실의 눈에만 보이기 시작하는 정체불명의 남자 역을 맡았습니다. 그는 난닝구에 반바지 차림으로 나타나 자신이 장국영이라고 주장합니다. 찬실은 그를 쫓아내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찬실 곁을 맴돕니다. 그리고 찬실이 애써 외면하고 있던 아픈 질문을 자꾸만 꺼내놓습니다. 그는 유령이라기보다 찬실의 마음 한구석이 밖으로 삐져나온 매개체로 보여집니다.

 

- 그 외

배우 소피 역은 윤승아가, 찬실이 마음을 두게 되는 연하의 불어 선생 김영 역은 배유람이 맡았습니다. 두 사람은 찬실의 흔들리는 마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비춰주는 인물들입니다.

 

2. 명장면, 명대사 소개

- 사람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

 할머니가 한글 수업 숙제로 시를 써야 한다며 찬실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삐뚤빼뚤한 글씨에 맞춤법도 맞지 않는 그 시를 찬실이 소리 내어 읽습니다. "사람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딱 한 줄입니다. 그 한 줄을 읽던 찬실은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립니다.

 

 이 장면이 이 영화의 심장이라고 생각합니다. 할머니는 먼저 보낸 딸을 떠올리며 그 문장을 썼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문장은 감독을 잃고 일도 잃은 찬실의 마음까지 정확하게 관통해 버립니다. 서툰 맞춤법이 오히려 감정을 더 날것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문장이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의 진심이 담긴 문장이 사람을 울린다는 걸 이 장면만큼 잘 보여주는 장면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더욱 울림을 주는 장면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 저는 크리스토퍼 놀란 영화가 더 좋아요

 찬실은 마음에 둔 김영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영화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런데 김영은 담담하게 자신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가 더 좋다고 답합니다. 찬실은 웃으며 넘기지만 그 순간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집니다.

 

 취향이 다르다는 건 사실 아무 잘못도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 전부를 걸어온 것이 상대에게는 그저 여러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은 너무 차갑고 조금은 받아들이기 어렵기도 합니다. 찬실이 나중에 김영에게 마음을 접게 되는 이유도 결국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짧은 대사 한 줄로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정확히 재어놓은, 아주 영리한 장면입니다.

 

-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모른다는 것

 장국영은 찬실에게 계속 묻습니다. 당신이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 그걸 모르는 것이 문제라고 말입니다. 찬실은 처음엔 화를 내며 그를 밀어냅니다. 자신은 평생 영화만 하고 살아왔으니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 무렵 찬실은 다른 결론에 다다릅니다. 자신이 그토록 오래 붙잡고 있던 것이 정말 좋아서였는지, 아니면 그것 말고는 붙잡을 게 없어서였는지를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저는 이 질문이 이 영화가 관객에게 건네는 진짜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찬실이와 같은 그런 삶을 살아온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저도 조금은 그런 성향이었는데 이 영화를 계기로 한번 깊게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 손전등을 들고 걸어 내려오는 밤길

 마지막 장면에서 찬실은 소피, 할머니와 함께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 캄캄한 산동네 길을 내려옵니다. 대단한 반전도 없고 성공도 없습니다. 그저 어두운 길을 함께 걸어 내려올 사람이 곁에 있을 뿐입니다.

 

 영화의 제목이 왜 "찬실이는 복도 많지"인지를 이 장면이 조용히 설명해 줍니다. 찬실은 돈도 집도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녀 곁에는 밥을 챙겨주는 할머니가 있고, 일자리를 내어준 친구가 있고, 심지어 자기 마음까지 대신 물어봐 주는 유령이 하나 있습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지금 주위를 둘러보면 나와 이야기나눌, 밥을 먹을, 놀아줄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3.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음악

 이 영화의 정서를 붙들고 있는 곡은 "희망가"입니다. 찬실은 영화 초반, 짐을 나르며 이 노래를 무심코 흥얼거립니다. 그리고 영화의 끝자락에서 다시 한번 이 곡이 아코디언 연주로 흘러나옵니다.

 

 100년 가까이 불려온 이 오래된 노래는 세상살이의 덧없음을 이야기하면서도 제목만큼은 "희망가"입니다. 인생이 참 별거 없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래도 살아보자고 하는 이 모순적인 노래가, 망했다고 중얼거리면서도 끝내 손전등을 켜고 걸어 나가는 찬실과 소름돋게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과 끝에 같은 곡을 배치한 감독의 영리한 선택이 그래서 더 인상적으로 느껴집니다.

 

4. 감상평

 이 영화는 김초희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입니다. 감독은 오랫동안 영화 현장에서 프로듀서로 일했고, 실직의 시간을 직접 겪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찬실의 막막함에는 지어낸 이야기의 냄새가 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영화 속 아버지의 편지를 감독의 실제 아버지가 직접 읽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이 영화가 얼마나 사적인 고백이었는지 짐작하게 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몇 번이나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찬실이 겪는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에만 매달려 살다 보면 그것이 사라졌을 때 자기 자신도 함께 사라져 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찬실은 정확히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거기서 대단한 해결책을 내놓지 않습니다. 대신 밥 한 끼, 시 한 줄, 함께 걷는 밤길 같은 것들을 조용히 늘어놓을 뿐입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다시 곱씹어보면 웃기게도 그게 답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생이 망했다고 느낄 때 필요한 건 근사한 계획이 아니라, 오늘 저녁을 같이 먹어줄 사람일지도 모르니까요.

 

 이 영화는 2020년 3월에 개봉했고 관객 수는 3만 명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개봉 시기가 좋지 않았던 탓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여러 상을 받았고, 백상예술대상과 청룡영화상에서도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성만큼은 확실히 인정받았습니다. 일본에서도 개봉해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요즘 마음이 좀 지쳐 있거나, 열심히 살았는데 남은 게 없는 것 같아 허탈한 기분이 드시는 분이라면 이 영화를 꼭 한 번 보시길 추천해 드립니다. 95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동안 아주 조용하게 위로받는 경험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