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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어지는 땅, 우리는 같은 땅을 자리만 바꿔가며 딛고 있다

by 라이언빌 2026. 8. 8.

이번 글에서는 <이어지는 땅>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포스터를 처음 봤을 때 인물들이 서로 조금씩 겹치듯 서 있는 구도가 눈에 들어왔는데, 보고 나니 그 구도 자체가 이 영화의 이야기 방식이더라고요.

전에 리뷰했던 <스프린터>의 지현에 이어, 이번엔 공민정 배우님이 완전히 다른 결의 인물로 어떻게 스며드는지 끝까지 확인해보세요!

 

이어지는 땅(2024.1.) 포스터
이어지는 땅(2024.1.) 포스터

 

 

<목차>

1. 영화 소개와 등장인물
2. 공민정이 연기한 이원이라는 인물
3. 명장면, 명대사 소개
4. 감상평

 

 

1. 영화 소개와 등장인물

 

 조희영 감독의 장편으로, 2022년 완성되어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섹션과 서울독립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고, 2024년 1월 10일에야 정식 개봉했습니다. 감독은 이 영화를 두고 "우리는 움직이는 땅을 자리만 바꿔 가며 디디고 서 있다"는 말로 연출 의도를 밝힌 바 있습니다.

 

 런던에 살고 있는 호림은 우연히 주운 캠코더 속에서 낯선 여자의 영상을 발견합니다. 얼마 뒤 그는 헤어진 옛 애인 동환을 다시 만나고, 동환의 새 여자친구인 경서를 만나고, 마지막으로 경서의 친구이자 캠코더 영상 속 주인공이었던 이원을 만나게 됩니다. 우연이 겹치고 겹쳐 어느새 필연처럼 이어지는 인연을, 롱테이크와 롱쇼트로 천천히 담아낸 작품입니다.

 

- 배우 정회린(호림 역)

 런던 유학 중 우연히 주운 캠코더를 통해 낯선 인연의 실마리를 얻는 인물입니다. 헤어진 옛 애인을 다시 마주하면서 잊고 있던 감정과 다시 대면하게 됩니다.

 

- 배우 류세일(동환 역), 김서경(경서 역)

 류세일은 호림의 옛 애인이자 지금은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는 동환을, 김서경은 동환의 현재 애인이자 이원의 친구인 경서를 연기했습니다.

 

- 배우 공민정(이원 역)

 경서의 친구이자, 호림이 주운 캠코더 영상 속에서 처음 마주쳤던 여성입니다. 조경 관련 일을 하는 인물로, 호림이 다른 인물들을 거쳐 마지막에 도달하게 되는 존재입니다. 이 글에서는 이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게임의 최종 보스 캐릭터처럼 다들 거쳐가야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니, 대체 어떤 스토리가 담겨 있을지 궁금하시지 않나요.

 

2. 공민정이 연기한 이원이라는 인물

 

 이원은 이 영화에서 가장 늦게 등장하지만, 사실상 이야기 전체가 그녀를 향해 흘러가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호림은 캠코더 영상 속에서 이원을 먼저 보고, 옛 애인과 그의 새 애인을 차례로 거친 뒤에야 비로소 그녀와 마주하게 됩니다. 낯선 사람에서 시작해 몇 겹의 인연을 통과한 끝에 도달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원이라는 캐릭터는 이 영화가 말하려는 우연과 필연의 경계를 몸소 구현하는 존재입니다.

 

 조경 일을 한다는 설정도 의도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땅을 다루고 가꾸는 일을 하는 사람이, 영화 제목이 말하는 '이어지는 땅' 위에 실제로 발을 딛고 서 있는 사람으로 그려지는 것이죠. 저는 이 설정 자체가 이미 절반은 캐릭터를 완성해놓고 시작한다고 느꼈습니다. 감독의 연출이 인물이 스스로 사연을 털어놓을 때까지 카메라가 끈기 있게 기다리는 방식이라, 이원 역시 정보로 소개되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서서히 드러나는 인물에 가깝습니다. 그 여백을 채우는 것이 배우의 몫이었을 것이고, 공민정 배우는 낯선 땅에서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얼굴이 아니라 그 땅에 뿌리내리고 있는 사람의 안정감으로 이 인물을 채워 넣습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존재감만으로 자리를 채우는 연기가 오히려 더 단단한 기억을 심어주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3. 명장면, 명대사 소개

 

- 캠코더 속에서 먼저 만난 사람

 호림이 낯선 땅에서 처음 마주하는 건 이원이라는 실제 사람이 아니라, 캠코더 화면 속에 담긴 그녀의 모습입니다. 실물보다 영상이 먼저 도착하는 이 만남의 순서가 이 영화 전체의 정서를 예고합니다.

 

 저는 이 설정이 낯선 땅에서 관계가 만들어지는 방식을 소름돋게 정확히 비유한다고 생각합니다. 타지에서는 사람을 곧바로 만나기보다, 소문이나 흔적, 우연히 남겨진 기록을 통해 먼저 스치고 나서야 실제로 마주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원이라는 인물이 영상으로 먼저 도착했다가 마지막에야 실체로 나타나는 구조는, 낯선 땅에서 인연이 쌓이는 속도 그 자체를 보여줍니다. 저는 오랜 타지 생활을 해본 적은 없지만, 생각해본적 없던 관계 형성 방식을 이런식으로 끄집어 내 그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매우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 몇 사람을 거쳐야 닿는 얼굴

 호림은 이원에게 곧바로 가닿지 않습니다. 옛 애인 동환을 거치고, 동환의 새 애인 경서를 거친 뒤에야 비로소 이원과 마주합니다. 관계가 관계를 통해서만 이어진다는 걸 이 우회로가 보여줍니다.

 

 이 구조에서 이원은 이야기의 종착점이면서 동시에 가장 낯선 존재로 남습니다. 저는 이 지점이 특히 흥미로웠습니다. 가장 늦게 도착한 사람이 오히려 가장 오래 마음에 남는 경우가 있는데, 이원이 정확히 그런 자리에 놓여 있는 것 입니다.

 

- 롱테이크로 붙잡는 침묵

 감독은 인물들이 자신의 사연을 스스로 꺼내놓을 때까지 카메라를 오래 붙들어 둡니다. 설명하는 대사보다 침묵과 풍경이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순간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래서 좀 답답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데, 그런 여백마저 연기의 일부라 생각하고 감상해주신다면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원 역시 이런 방식으로 서서히 자신을 드러내는 인물입니다. 정보를 몰아서 주는 인물이 아니라, 함께 있는 시간이 쌓여야만 조금씩 알게 되는 사람입니다. 이런 인물을 연기하는 일은 대사에 기대지 않고 존재감만으로 장면을 채워야 한다는 뜻이라, 배우에게는 오히려 더 어려운 과제였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장면들을 볼 때마다, 말이 없어도 다 보여지는 연기가 사실 제일 어려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4. 감상평

 

 이 영화는 서사보다 감흥에 기대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연히 주운 캠코더 하나로 시작된 이야기가 몇 사람을 거쳐 필연처럼 이어지는 구조 자체는 익숙할 수 있지만, 이 영화가 그 인연을 다루는 방식은 사뭇 다릅니다. 사건을 밀어붙이기보다, 낯선 땅 위에서 인물들이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을 인내심 있게 지켜보게 만듭니다.

 

 이원이라는 인물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이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낯선 땅 위에 서 있습니다. 유학을 온 호림도, 헤어짐과 새로운 만남을 거듭하는 동환과 경서도, 그리고 그 모든 인연의 끝에서 조경 일을 하며 실제로 땅을 다루는 이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이 중에서도 이원이 가장 그 문장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느꼈는데, 감독이 말한 "움직이는 땅을 자리만 바꿔 가며 딛고 서 있다"는 문장이 가장 문자 그대로 들어맞는 인물이 바로 공민정 배우가 연기한 이원이라는 캐릭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인물들이 관계 속에서 흔들리는 동안, 이원은 자신이 딛고 선 땅을 직업으로 삼아 가꾸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이 영화는 2022년 완성 이후 여러 영화제를 거쳐 2년 뒤에야 정식 개봉했습니다. 무주산골영화제, 디아스포라영화제, 남도영화제 등 여러 지역 영화제에 꾸준히 초청되며 조용히 관객을 만나온 작품입니다. 화려한 사건 없이도 인물과 공간의 결을 오래 들여다보고 싶으신 분이라면, 그리고 낯선 곳에서 관계가 어떻게 서서히 쌓이는지를 지켜보고 싶으신 분이라면 이 영화, 마음에 조용히 담아 가시길 권해 드립니다. 87분의 러닝타임이 생각보다 느리게, 그리고 생각보다 오래 남을 것입니다.